데이터 기반 사회 계약 – 신뢰는 어떻게 기술로 대체되는가? 오늘은 데이터 기반 사회 계약에 대해 소개해 드릴 예정입니다.
“신뢰는 사람이 아닌 알고리즘이 담당하는 시대”
신뢰는 더 이상 사람 사이의 문제가 아니다
역사적으로 '신뢰'는 사회를 유지하는 가장 기본적인 토대였다. 사람이 사람을 믿을 수 있어야 거래가 이루어지고, 약속이 지켜지며, 조직이 작동한다. 이 신뢰는 오랜 시간, 경험, 평판, 감정, 공동체 같은 인간 중심의 방식으로 축적되어왔다. 하지만 이제 세상은 달라지고 있다.
디지털 사회는 기존의 신뢰 방식을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과 온라인 거래를 해야 하고, 자동화된 알고리즘과 계약을 맺으며, 글로벌 플랫폼과 1인 사용자가 직접 연결되는 구조가 보편화됐다. 이처럼 복잡하고 비대면적인 구조에서는 전통적인 신뢰 방식이 한계에 도달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기술 기반의 신뢰, ‘Trustless Trust’, 즉 상대방을 신뢰하지 않아도 계약이 실행되는 시스템이 주목받는다. 신뢰가 사람이 아니라 ‘코드’와 ‘데이터’에 의해 설계되고 유지되는 사회가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블록체인, 디지털 신원 인증, 스마트 계약, 알고리즘 통치 시스템이 있다.
이제 신뢰는 '느낌'이 아니라, 수학적으로 보증된 데이터를 기반으로 작동한다.
우리는 지금, 기술이 신뢰를 대체하는 사회에 진입하고 있다.
계약과 권력은 어떻게 알고리즘으로 이관되는가
① 블록체인: 분산된 신뢰의 인프라
블록체인은 신뢰의 개념을 완전히 뒤집은 기술이다.
기존에는 누군가를 믿기 위해 중간자가 필요했다. 은행, 공증기관, 중개인, 심지어 정부까지. 하지만 블록체인은 중개자 없이, 모든 거래와 기록이 공개되고 누구나 검증할 수 있는 구조를 제공한다.
이 기술은 신뢰를 분산시켰다. 누구나 네트워크를 확인할 수 있고, 기록은 수정 불가능하며, 계약은 자동으로 실행된다(스마트 계약). 여기엔 감정, 정치, 편향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
신뢰를 위해 사람을 설득할 필요가 없고, 시스템이 그것을 보증한다.
이러한 기술은 단순한 금융 분야를 넘어, 자산 소유권, 토지 계약, 저작권, 투표 시스템 등 다양한 영역에 적용되고 있다.
이제 "계약서에 사인"이 아니라 "스마트 계약 코드를 실행"하는 사회가 되고 있다.
② 디지털 신원 인증: 누구인지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증명하는’ 시대
온라인에서 신원은 핵심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로그인, 비밀번호, 인증코드 같은 불안정한 방식에 의존하고 있다. 이 방식은 해킹과 사기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디지털 신원 인증은 블록체인과 생체 정보, 암호화 기술 등을 기반으로, 한 번의 인증으로 다양한 플랫폼에서 나를 증명할 수 있는 통합적 신원 시스템을 제공한다. 이를 통해 사용자는 개인정보를 노출하지 않고도 특정 자격(성인 여부, 회원 상태 등)을 증명할 수 있다.
대표적인 예가 자기주권 신원(Self-Sovereign Identity, SSI) 시스템이다. 이 구조에서는 중앙기관 없이도 개인이 자신의 신원을 직접 소유하고 관리한다. 신뢰의 권한이 국가나 기관에서 개인에게 넘어가는 흐름이다.
③ 알고리즘 통치: 사람이 아닌 코드가 규칙을 실행한다
플랫폼 경제는 우리가 이미 ‘알고리즘 통치’를 경험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우버, 에어비앤비, 배달앱, 소셜미디어의 콘텐츠 추천까지 — 운영자 없이도 시스템이 스스로 작동하고 결정하는 구조가 보편화됐다.
이러한 알고리즘 통치는 공정성과 객관성을 앞세우지만, 동시에 책임의 회피, 불투명한 로직, 인간의 결정권 축소라는 문제를 낳기도 한다. 예를 들어 어떤 사용자가 ‘자동 필터링’에 의해 차단되었을 때, 누구에게 이의를 제기할 수 있을까?
권력은 사람이 아닌, 이해하기 어려운 코드의 형태로 작동하고 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공공 행정, 도시 운영, 환경 규제 등에도 알고리즘 통치가 확산될 수 있다. ‘정부’의 역할이 코드화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코드가 법이다(Code is Law)’라는 디지털 사회의 핵심 철학이다.
신뢰의 기술화가 만드는 사회 구조의 변화
이제 우리는 기술 기반 신뢰의 사회적 결과를 본격적으로 고민해야 한다.
사람을 믿지 않아도 되는 사회는, 과연 이상적인가?
① 중개자의 소멸과 자율 시스템의 확산
은행, 부동산 중개업자, 공증인, 플랫폼 운영자 등은 이제 필수가 아니다. 블록체인과 스마트 계약은 이러한 전통적 중개자의 역할을 제거하며, 보다 효율적인 구조를 만든다.
이는 비용 절감과 속도 향상을 가능하게 하지만, 동시에 기존 직업의 해체와 새로운 형태의 신뢰직군을 요구하게 된다.
② 개인 권한의 강화 vs 감시의 강화
디지털 신원 시스템은 개인에게 더 많은 통제권을 주지만, 반대로 데이터 기반 감시와 통제의 가능성도 높인다. 모든 행동이 기록되고 분석될 수 있으며, 신뢰 점수 시스템(소셜 크레딧 등)이 현실화될 수 있다.
신뢰를 시스템에 맡긴다는 것은 동시에 권력을 기술에 넘기는 것일 수 있다.
③ 신뢰의 재정의 – 인간적 신뢰의 종말인가, 진화인가?
기술이 대체하는 신뢰는 '확률적 정직성'일 뿐이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감정적 신뢰, 실수에 대한 용서, 맥락적 판단 등은 아직 기술이 담기 어려운 영역이다.
우리는 이제 신뢰를 단지 계산 가능한 함수로 축소시킬 것인지, 아니면 인간성과 기술의 접점을 찾을 것인지에 대한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마무리하며: 신뢰는 없어지고 있는가, 재설계되고 있는가?
기술은 신뢰를 대체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대체'가 아니라, 재설계다.
우리는 지금 신뢰를 다시 코딩하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블록체인은 신뢰를 수학으로 변환하고, 스마트 계약은 약속을 코드로 만들며, 알고리즘은 판단을 공식화한다.
그러나 신뢰는 여전히 인간적 가치이며, 관계의 본질이다.
기술이 만든 새로운 신뢰는 효율성과 투명성을 제공하지만, 윤리와 감정, 공동체의 맥락을 담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결국 중요한 건 기술이 아니라, 그것을 설계하고 사용하는 우리의 철학과 태도다.
앞으로의 사회 계약은 법률 문서가 아닌 데이터로 서명될 것이다.
그 계약이 인간을 위한 것일지, 시스템을 위한 것일지는 지금 우리가 선택해야 할 문제다.